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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60

국립진주박물관 - 17. 두암관 1.(2012.10.) 이제 지리산 자락의 하동 섬진강 일대에서 수록된 정보를 전시하는 두암관으로 옮겨서 구경을 해보자. 그런데 2012년에 처음으로 두암관을 방문 했는데, 2년후 2014년 두암관을 방문하니 많이 달라져 있었다. 이번 포스트 에서는 2012년의 두암관 모습을 먼저 올리고 2014년의 두암관 모습은 다음 포스트에서 보 여 드리겠습니다. 인문지리적 환경 지리적으로 하동은 동쪽의 진주, 서쪽의 구례 * 광양, 남쪽의 남해, 북쪽의 구례 * 남원과 경계를 이룬다. 지리산과 접한 북쪽은 지세가 높고, 남쪽은 지세가 비교적 평탄하다. 지리산에서 발원하는 여러 갈래의 시냇물이 강으로 유입 되면서 수려한 경관을 조성하였다. 특히 하동의 동맥 이라 할 수 있는 섬진강은 영남과 호남, 그리고 내륙과 해안을 연결하는 고리였다. .. 2014. 2. 25.
국립진주박물관 - 13. 남명조식의 실천사상 남명조식의 실천사상 도덕성을 강조하고 의리와 명분을 중시하는 성리학은 조선의 국가 이념이었다. 이러한 성리학은 16세기 들어 경남 서부지역의 남명 조식曺植에 의해 크게 발전 하였다. 그는 지리산 아래 산청에 터를 잡고 학문에 정진하며 후진 양 성에 힘썼는데, 특히 학문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궁리보다는 실천을 강조하였으며 성리학적 사회질서 및 윤리도덕 의 구현에 앞장섰다. 당시 성리학의 대학자 이황에게 보낸 편지 중 “손으로 물 뿌리고 청소하는 절도도 모르면서 입 으로만 하늘의 이치를 논하는 것은 그만두어야 한다.” 는 글귀는 그의 사고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의 학문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경의사상敬義思想’으로 요약된다. 경敬은 내적 수양을 통해 마음을 밝고 올바르게 하여 근본을 세우는 것이고, 의義는 경敬.. 2014. 2. 1.
국립진주박물관 - 12. 남해의 분사대장도감 남해의 분사대장도감 고려는 1232년(고종 19) 몽고의 침략으로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이 불타버리자,부처의 힘을 빌어 몽고를 물리칠 목적으로 대장도감과 분사대장도감分司大藏都監을 설치하였다. 분사의 위치는 팔만대징경판의 기록을 토대로 진주 관내인 남해로 추정하고 있다. 남해는 지리적 여건상 몽고군 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고, 밀물과 썰물의 조수 차가 심하여 경판으로 사용해야 하는 목재의 특성을 살리기에 적합한 장소이기도 하다. 또한 남해가 위치한 진주목은 최씨 무인정권의 식읍지로 분사의 운영을 위한 재정적 기 반을 갖추고 있었다. 당시 분사를 운영하던 최우崔瑀의 처남 정안鄭晏(?~1251)은 일연一然 스님을 남해의 정림 사로 청하여 대장경 조판에 도움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외에도 분사대장도감은 .. 2014. 1. 14.
국립진주박물관 - 11, 경남의 옛 절터 에서 출토된 유적들... 서부경남의 가야 가야伽倻는 562년 멸망할 때 까지 하나의 통일된 국가를 이루지 못한 연맹세력으로 결국 신라新羅에 병합되었다. 가야는 풍부한 철을 바탕으로 중국, 일본 등과 활발히 교역하여 선진문화와 부를 축적함으로써 강력한 군사집단으 로 성장하였다. 가야의 연맹세력은 대체로 5세기 후반을 경계로 전기와 후기로 구분되는데, 전기에는 낙동강 하류지역의 금관가야, 후기에는 낙동강 서부지역의 산악지대에 거점을 둔 고령의 대가야가 연맹의 맹주로서 군림하였다. 고령의 대가야를 맹주국으로 한 가야연맹은 합천, 함양, 산청, 남원 등 지리산 주변과 진주, 사천, 고성, 그리고 섬진 강유역에 이르는 경남 서부지역의 대부분을 포함하는 넓은 세력판도를 형성하였다. 대가야연맹은 전반적으로 유사한 문화권을 형성하면서도 독자적.. 2013. 12. 5.
국립진주박물관 - 10, 역사 문화실 * 진주시 대평면 대평리 출토유물. 역사문화실 진주를 중심으로 한 경남의 서부지역은 예로부터 땅이 기름지고 각종 물산이 풍부하여 살기 좋은 곳으로 이름나 있다. 우리 민족의 영산인 지리산이 서쪽에 자리하며 여기에서 발원한 물줄기는 남강이 되어 비옥한 농토를 제공해 준다. 또한 천혜의 자연환경과 풍부한 어족자원을 가진 남해와 닿아 있어 일찍부터 사람이 살기에 적합하였다. 남강유역의 대평에서는 우리나라 최대의 청동기 취락유적이 발견되었다. 남해의 늑도패총에서는 일본을 비롯한 중국, 러시아 등의 문화재가 발견되어 2,000여년전에 이미 이들 국가와 교역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지역은 신비의 왕국 가야의 옛 땅으로 합천의 옥전 고분을 비롯한 수준 높은 문화유적이 각지에서 발견되고 있다. 한편 지리산은 산신과 성모신앙, 무속 등과 같은 .. 2013. 12. 4.
국립진주박물관 - 9, 정유재란과 종전. 정유재란과 종전 1596년(선조 29) 9월 명과의 강화 회담이 결렬되자 도요토미의 명령에 따라 이듬해 1월 14일 14만 4천여 명의 일본군이 재침공하였다. 일본군은 호남과 충청도를 통해 동시에 서울로 침공할 계획을 세웠다. 일본 수군은 7월 칠천량에서 원균이 이끄는 조선수군을 괴멸시켰다. 육상에서도 남원성을 함락시키고 진격하 였다. 그러나 조명연합군은 직산전투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고, 해전에서는 재기용된 이순신이 명량 해전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투들은 전세를 역전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후 조명연합군 은 일본군이 본거지로 삼고 있는 울산, 사천, 순천을 동시에 공격하여 일본군을 압박하였다. 1598년 8월 도요토미가 사망하자 일본군의 퇴각명령이 내려졌고, 이때 이순신은 노량에서 .. 2013. 12. 3.
국립진주박물관 - 8, 명군 참전의 공과. 명군 참전의 공과 임진왜란 이전부터 일본의 대대적인 침입에 대한 소문이 무성하였기 때문에 명나라는 조선이 단기간 내 일본군에게 일방적인 패배를 당하자, 일본과의 동맹을 의심하여 실태를 조사하기 위한 관리를 파견 하기도 했다. 명 조정은 조선의 파병요청에 대해 논란 끝에 중국영토 밖에서 외적을 물리친다는 원칙 아래 원군을 파병하였다. 조선은 명군의 지원으로 몇 가지 이점을 얻을 수 있었다. 첫째, 평양과 서울 등을 탈환하고 대부분의 국토를 단기간 내 수복할 수 있었다. 둘째, 조선의 배후에는 명나라가 후원하고 있다는 점을 일본에게 명확히 인식시켰다. 셋째, 전쟁기간 중의 파농과 기근으로 부족해진 식량을 지원받았다. 그러나 명군의 지원은 반대로 부정적인 영향도 있었다. 첫째, 명군의 지휘권 행사로 조선군은 .. 2013. 12.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