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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92

국립진주박물관 - 14. 일상의 기록. 일상의 기록 이 지역에서 문자의 사용은 창원 다호리茶戶里 고분에서 발견된 붓을 통해 기원 전후 시기에 이미 이루어졌을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현존하는 자료는 5세기 이후의 가야伽倻부터이며 신라新羅에 들어 문자 사용예가 다수 발견되었는 데, 이는 고대 신라사 연구를 비롯한 다양한 정보를 제공해 준다. 대규모의 국가적 불교행사와 관련하여 세운 것으로 보이는 사천의 신라비新羅碑는 신라의 중앙과 지방의 관계, 중국 과의 교류 상황을 알려주는 자료이다. 함안산성咸安山城에서 출토된 목간木簡(먹글을 쓴 나무 조각)은 6세기 중엽에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우리나라 출토 목간의 약 50%에 해당하는 162점이 확인되어 당시 낙동강 상류의 교역 상황을 보여준다. 일상생활과 관련된 기록들은 시대를 달리하며 곳곳에 남아.. 2014. 2. 11.
국립진주박물관 - 12. 남해의 분사대장도감 남해의 분사대장도감 고려는 1232년(고종 19) 몽고의 침략으로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이 불타버리자,부처의 힘을 빌어 몽고를 물리칠 목적으로 대장도감과 분사대장도감分司大藏都監을 설치하였다. 분사의 위치는 팔만대징경판의 기록을 토대로 진주 관내인 남해로 추정하고 있다. 남해는 지리적 여건상 몽고군 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고, 밀물과 썰물의 조수 차가 심하여 경판으로 사용해야 하는 목재의 특성을 살리기에 적합한 장소이기도 하다. 또한 남해가 위치한 진주목은 최씨 무인정권의 식읍지로 분사의 운영을 위한 재정적 기 반을 갖추고 있었다. 당시 분사를 운영하던 최우崔瑀의 처남 정안鄭晏(?~1251)은 일연一然 스님을 남해의 정림 사로 청하여 대장경 조판에 도움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외에도 분사대장도감은 .. 2014. 1. 14.
국립진주박물관 - 11, 경남의 옛 절터 에서 출토된 유적들... 서부경남의 가야 가야伽倻는 562년 멸망할 때 까지 하나의 통일된 국가를 이루지 못한 연맹세력으로 결국 신라新羅에 병합되었다. 가야는 풍부한 철을 바탕으로 중국, 일본 등과 활발히 교역하여 선진문화와 부를 축적함으로써 강력한 군사집단으 로 성장하였다. 가야의 연맹세력은 대체로 5세기 후반을 경계로 전기와 후기로 구분되는데, 전기에는 낙동강 하류지역의 금관가야, 후기에는 낙동강 서부지역의 산악지대에 거점을 둔 고령의 대가야가 연맹의 맹주로서 군림하였다. 고령의 대가야를 맹주국으로 한 가야연맹은 합천, 함양, 산청, 남원 등 지리산 주변과 진주, 사천, 고성, 그리고 섬진 강유역에 이르는 경남 서부지역의 대부분을 포함하는 넓은 세력판도를 형성하였다. 대가야연맹은 전반적으로 유사한 문화권을 형성하면서도 독자적.. 2013. 12. 5.
국립진주박물관 - 9, 정유재란과 종전. 정유재란과 종전 1596년(선조 29) 9월 명과의 강화 회담이 결렬되자 도요토미의 명령에 따라 이듬해 1월 14일 14만 4천여 명의 일본군이 재침공하였다. 일본군은 호남과 충청도를 통해 동시에 서울로 침공할 계획을 세웠다. 일본 수군은 7월 칠천량에서 원균이 이끄는 조선수군을 괴멸시켰다. 육상에서도 남원성을 함락시키고 진격하 였다. 그러나 조명연합군은 직산전투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고, 해전에서는 재기용된 이순신이 명량 해전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투들은 전세를 역전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후 조명연합군 은 일본군이 본거지로 삼고 있는 울산, 사천, 순천을 동시에 공격하여 일본군을 압박하였다. 1598년 8월 도요토미가 사망하자 일본군의 퇴각명령이 내려졌고, 이때 이순신은 노량에서 .. 2013. 12. 3.
국립진주박물관 - 8, 명군 참전의 공과. 명군 참전의 공과 임진왜란 이전부터 일본의 대대적인 침입에 대한 소문이 무성하였기 때문에 명나라는 조선이 단기간 내 일본군에게 일방적인 패배를 당하자, 일본과의 동맹을 의심하여 실태를 조사하기 위한 관리를 파견 하기도 했다. 명 조정은 조선의 파병요청에 대해 논란 끝에 중국영토 밖에서 외적을 물리친다는 원칙 아래 원군을 파병하였다. 조선은 명군의 지원으로 몇 가지 이점을 얻을 수 있었다. 첫째, 평양과 서울 등을 탈환하고 대부분의 국토를 단기간 내 수복할 수 있었다. 둘째, 조선의 배후에는 명나라가 후원하고 있다는 점을 일본에게 명확히 인식시켰다. 셋째, 전쟁기간 중의 파농과 기근으로 부족해진 식량을 지원받았다. 그러나 명군의 지원은 반대로 부정적인 영향도 있었다. 첫째, 명군의 지휘권 행사로 조선군은 .. 2013. 12. 2.
국립진주박물관 - 7, 임진왜란 의병. 임진왜란 의병 임진왜란이 일어나 정규군이 붕괴되자 백성 스스로 자기 고장을 지키고 외적을 물리쳐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뭉쳐 일어났던 것이 의병이다. 의병은 대개 그 지방의 유력자를 중심으로 양반에서 천민에 이르기까지 적게는 몇 십 명에서 많게는 몇 천 명 까지 적극 호응하였다. 이들은 개인의 재산을 사용하여 물자를 조달했으며, 부대마다 지켜야 할 군율을 정하고 일본군을 무찌를 것을 맹세했다. 또한 대장 아래 군사의 훈련, 물자의 조달, 전략 수립 등을 담당한 참모들을 두기도 하였다. 임진왜란 초기, 전국에 걸쳐 일어났던 의병은 일본군을 기습하는 게릴라 전법을 구사하여 그들 의 진격을 막고, 민심을 안정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이들 의병활동의 원천은 무기나 병력 등의 물리적 조 건이 아니라 .. 2013. 12. 1.
국립진주 박물관 - 6, 임진왜란 * 일본군의 전략과 점령정책. 일본군의 전략과 점령정책. 임진왜란을 일으킨 일본의 초기 전략은 단기간에 조선 전역을 장악하고 이곳으로부터 군수물자를 공급받아 명나라로 진격하는 것이었다. 또한 이들은 조선의 통치체제도 자신들과 같이 봉건체제여서 전국팔도가 각각 다른 나라로 이루 어진 것으로 생각하곻 그 통치자만 항복하면 통치하는 영역은 자신들의 판도가 될 것으로 생각하였다. 일본군은 빠르게 북상하여 20일 만에 서울을 점령했음에도 불구하고 국왕의 피난으로 항복을 받지 못하였다. 이에 일 본군 장수들은 1592년 5월 초 서울에 모여 조선 각 도를 분담하여 점령하고 군수물자를 조달하기로 했다. 아울러 도 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입국에 대비하여 부산에서 서울에 이르는 도로의 정비와 숙소 건설을 계획했다. 그러나 1592 년 7월을 기점으로.. 2013. 12.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