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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7

국립진주박물관 - 9, 정유재란과 종전. 정유재란과 종전 1596년(선조 29) 9월 명과의 강화 회담이 결렬되자 도요토미의 명령에 따라 이듬해 1월 14일 14만 4천여 명의 일본군이 재침공하였다. 일본군은 호남과 충청도를 통해 동시에 서울로 침공할 계획을 세웠다. 일본 수군은 7월 칠천량에서 원균이 이끄는 조선수군을 괴멸시켰다. 육상에서도 남원성을 함락시키고 진격하 였다. 그러나 조명연합군은 직산전투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고, 해전에서는 재기용된 이순신이 명량 해전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투들은 전세를 역전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후 조명연합군 은 일본군이 본거지로 삼고 있는 울산, 사천, 순천을 동시에 공격하여 일본군을 압박하였다. 1598년 8월 도요토미가 사망하자 일본군의 퇴각명령이 내려졌고, 이때 이순신은 노량에서 .. 2013. 12. 3.
국립진주박물관 - 8, 명군 참전의 공과. 명군 참전의 공과 임진왜란 이전부터 일본의 대대적인 침입에 대한 소문이 무성하였기 때문에 명나라는 조선이 단기간 내 일본군에게 일방적인 패배를 당하자, 일본과의 동맹을 의심하여 실태를 조사하기 위한 관리를 파견 하기도 했다. 명 조정은 조선의 파병요청에 대해 논란 끝에 중국영토 밖에서 외적을 물리친다는 원칙 아래 원군을 파병하였다. 조선은 명군의 지원으로 몇 가지 이점을 얻을 수 있었다. 첫째, 평양과 서울 등을 탈환하고 대부분의 국토를 단기간 내 수복할 수 있었다. 둘째, 조선의 배후에는 명나라가 후원하고 있다는 점을 일본에게 명확히 인식시켰다. 셋째, 전쟁기간 중의 파농과 기근으로 부족해진 식량을 지원받았다. 그러나 명군의 지원은 반대로 부정적인 영향도 있었다. 첫째, 명군의 지휘권 행사로 조선군은 .. 2013. 12. 2.
국립진주박물관 - 7, 임진왜란 의병. 임진왜란 의병 임진왜란이 일어나 정규군이 붕괴되자 백성 스스로 자기 고장을 지키고 외적을 물리쳐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뭉쳐 일어났던 것이 의병이다. 의병은 대개 그 지방의 유력자를 중심으로 양반에서 천민에 이르기까지 적게는 몇 십 명에서 많게는 몇 천 명 까지 적극 호응하였다. 이들은 개인의 재산을 사용하여 물자를 조달했으며, 부대마다 지켜야 할 군율을 정하고 일본군을 무찌를 것을 맹세했다. 또한 대장 아래 군사의 훈련, 물자의 조달, 전략 수립 등을 담당한 참모들을 두기도 하였다. 임진왜란 초기, 전국에 걸쳐 일어났던 의병은 일본군을 기습하는 게릴라 전법을 구사하여 그들 의 진격을 막고, 민심을 안정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이들 의병활동의 원천은 무기나 병력 등의 물리적 조 건이 아니라 .. 2013. 12. 1.
국립진주 박물관 - 6, 임진왜란 * 일본군의 전략과 점령정책. 일본군의 전략과 점령정책. 임진왜란을 일으킨 일본의 초기 전략은 단기간에 조선 전역을 장악하고 이곳으로부터 군수물자를 공급받아 명나라로 진격하는 것이었다. 또한 이들은 조선의 통치체제도 자신들과 같이 봉건체제여서 전국팔도가 각각 다른 나라로 이루 어진 것으로 생각하곻 그 통치자만 항복하면 통치하는 영역은 자신들의 판도가 될 것으로 생각하였다. 일본군은 빠르게 북상하여 20일 만에 서울을 점령했음에도 불구하고 국왕의 피난으로 항복을 받지 못하였다. 이에 일 본군 장수들은 1592년 5월 초 서울에 모여 조선 각 도를 분담하여 점령하고 군수물자를 조달하기로 했다. 아울러 도 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입국에 대비하여 부산에서 서울에 이르는 도로의 정비와 숙소 건설을 계획했다. 그러나 1592 년 7월을 기점으로.. 2013. 12. 1.
국립진주박물관 - 5, 임진왜란의 중의 무기. 임진왜란의 원인 16세기 중엽, 백여 년의 센코쿠시대[戰國時代]를 끝내고 일본의 통일을 이룬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토지제도 정비와 영주들의 재배치, 광산 개발 등을 통해 권력을 굳혔다. 그는 일본을 넘어서 외국을 정복하려는 야심 을 가지고 철저한 준비 끝에 조선을 침략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있으나, 대략 다음과 같다. 첫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개인적 영웅심과 정복욕. 둘째, 조선과 명明에 대한 조공무역 朝貢貿易의 재개. 세째, 일본 내 강성한 봉건영주 세력의 해외원정으로 인한 세력 약화 기도. 넷째, 해외 획득 영토의 분배를 통한 측근 봉건영주의 논공행상. 그러나 조선과 명나라는 당시 일본 사정에 어두워 여러 가지 침략 조짐이 감지 되었으나 적절히 대처하지.. 2013. 11. 29.
국립진주박물관 - 4, 임진왜란 전투의 시작. 임진왜란 전투의 시작 1592년 4월 14일 새벽 일본군의 부산진성 공격으로 임진왜란이 시작되었다. 일년여의 전쟁준비를 마친 일본군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에 따라 대마도를 출발하여 전날 오후 5시경 부산 앞바다에 도착해 있었다. 일본군의 내습은 경상좌우도의 봉수를 통해 각지에 전해졌고, 부산진첨사 정발은 절영도에서 급히 귀환하여 방어 준비를 했으나 전쟁경험이 풍부하고 조총과 같은 신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의 1번 대인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의 군대 2만여 명 앞에서는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군은 새벽 3시부터 공격을 시작하여 약 두 시간 만에 성을 함락시켰고 정발은 전사하였다. 이날 일본군은 다대포에 부대의 일부를 보내 점령하니 다대포첨사 윤홍신이 전사 하였다. 다음날인 15일 6시부터 일본군은.. 2013. 11. 19.
국립진주박물관 - 3, 임진왜란실. 임진왜란 한국과 일본은 오랫동안 우호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16세기 말 조선은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 [豊臣秀吉]의 대륙 정복 야심 아래 총 15만 8천 명의 일본군에게 침략을 받게 되었고, 동아시아는 명군까지 참 전하여 삼국전쟁으로 확산되었다. 조선은 1592년(선조 25) 4월 14일 상륙한 일본군의 선봉대를 맞이하여 결사항전하였으나 부산진성과 동래성 이 바로 함락되고 서울은 20일만에 점령 당하였으며, 일본군은 두달만에 서북방면의 평양과 동북방면의 함경 도까지 진출하였다. 이에 선조 임금은 의주까지 피난하고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 일본군에게 막대한 타격을 입혔을 뿐만 아니라, 바다에서는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이 연전연승을 거두어 해상권을 완.. 2013. 11.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