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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고향 晋州.

진주성 탐방기 [晋州城 探訪記].1

by 五江山 2012. 10. 11.

 

 

     10월 2일 지금 진주는 축제중이다. 파란블로그 이사한다고 포스트가 많이 밀려서 포스트 올리려고 사진작업중있는

     데 딸아이가 구경 가잔다. “오늘 가장행렬도 안하는데... ” 하니 그래도 나가보잔다. 그래서 카메라 가방을 울러메고

     을 나섰다. 집이 신안동이다 보니 진주성 서편에 있는 서장대 부터 구경을 하기로 했다.

 

     10월 7일 일요일, 월요일부터 주간 들어가기 때문에 하루 쉰다. 야간일을 하고 집에와서 대충씻고 카메라 가방을 울러

     메고 집을 나섰다. 10월 2일 못담은 사진을 담기 위해서 였다.

 

     진주성은 외적을 막기 위하여 삼국시대부터 조성한 성으로 진주의 역사와 문화가 깃든 유서깊은 곳이다.고려 말 우왕 5

     년(1379년)에 진주목사 김중광(金仲光)이 잦은 왜구의 침범에 대비하여 본래 토성이던 것을 석성으로 고쳐 쌓았으며 임

     진왜란 직후에는 성의 중앙에 남북으로 내성을 쌓았다.

     선조 25년(1592년) 10월 왜군 2만이 침략해 오자 김시민(金時敏) 장군이 이끄는 3,800여 명의 군사와 성민이 힘을 합쳐

     물리쳤으니 이것이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진주 대첩이다.

     이듬해 6월에는 왜군 10만여 명이 다시 침략해 옴에 7만 민 * 관 * 군이 이에 맞서 싸우다 모두 순국하는 비운을 겪기도

     하였다.

     1972년 촉석문을 복원하였고, 1975년에는 일제강점기에 허물어졌던 서쪽 외성의 일부와 내성의 성곽을 복원하였다.

     1979년부터는 성 안팎의 민가를 모두 철거하는 등 진주성 정화사업을 시작해 2002년 공북문 복원 공사를 마지막으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성곽의 둘레는 1,760m이고, 높이는 5~8m이며 성 안에는 촉석루, 의기사, 영남포정사, 북장대, 창렬사, 호국사, 서장대,

     임진대첩계사순의단, 국립진주박물관 등이 있다.

 

 

 

       10월 7일 집을 나서서 서장대로 가면서 서장대의 모습을 담아봤다. 서장대 왼편에 진주성 서쪽문 입구가 있다.

 

 

 

       서장대로 올라가는 진주성 서문 입구에는 지금이 유등축제기간이다 보니 장군 및 포졸들의 유등을 설치해놨다.

 

 

 

    진주성 서쪽문이다. 왼편의 작은건물이 매표소이다. 물론 지금은 무료입장이다만은 ...

 

 

 

          진주성 서문을 들어서면서 바라본 호국사.

 

 

 

                                   

                           호 국 사 (護 國 寺)

          고려시대(高麗時代)에 창건된 것으로 전하는 이 절은 원래의 이름은 내성사(內城寺) 였다고 한다.  고려말기에

          왜구(倭寇)를 막기 위해 진주성을 고쳐 쌓고, 승병(僧兵)을 기리기 위해 창건된 것으로 생각되는 이 절은 임진

          란 때는 승군(僧軍)의 근거지가 되었다.

          제2차 진주성 싸움에서 성과 함께 운명을 같이 한 승병들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숙종임금께서 호국사(護國寺)란

          이름으로 재건하였다고 전한다.

          최근에 진주성을 정화하면서 일주문(一柱門) 자리가 발견되어 새로 세웠으며, 사찰의 건물들은 모두 근년에 새로

          이룩된 것이다.

 

          호국사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다음에 별도로 포스트를 올리기로 하고 다른곳을 둘러 보기로 해야 겠다.

 

 

 

          호국사 앞에는 수령이 몇백년 되어보이는 고목나무가 있고 그앞에는 이정표가 있다.

          이정표에는 안나와 있지만, 호국사 바로 옆에는창렬사 라는 사당이 있다.

 

 

 

          

                                            창 렬 사 (彰 烈 祠)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호

                                                                                       소재지 : 경상남도 진주시 남성동 213의 1

           창렬사(彰烈祠)는 임진왜란 당시인 1593년 제2차 진주성 싸움에서 장렬히 순국한 분들의 신위를

           모시기 위해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 정사호(鄭賜澔, 1553년~1616년)가 건립하여 선조 40

           년(1607년) 임금의 사액(賜額)을 받았다.

           제1차 진주성싸움에서 대승리를 거둔 김시민장군(金時敏將軍)을 모신 충민사(忠愍祠)가 고종 5년

           (1868년) 대원군(大院君)의 서원철폐령으로 헐어지게 되자 장군의 신위를 이곳으로 옮겨와 함께

           모셨다. 지금 이 사당에는 충무공 김시민장군(忠武公 金時敏將軍)의 신위를 맨 윗자리에 모시고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 충청도(忠淸道)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황진(黃進), 경상우도(慶

           尙右道) 병마절도사(兵馬節道使) 최경회(崔慶會) 등 임진왜란 때 순국한 39분의 신위를 모시고 있

          으며, 모두 목숨을 아까워 하지 않고 나라를 위해 장렬히 싸우다 순국한 분들로서 이름이 천추에 빛

          나고 있다.

 

 

 

         창렬사 안을 둘러보기 위해서 有重門(유중문)을 들어가보기로 했다.

 

 

 

         有重門(유중문)을 들어서니 이번에는 전파문(가운데 글자가 꽃'파' 자 인데 컴에서 지원이 안되서 그냥 한글로 씀)

       이 높은자리에 우뚝 서 있다.

 

 

 

         전파문을 열고 들어서니 창렬사가 나온다.

 

 

 

        창렬사 안에는충무공 김시민장군(忠武公 金時敏將軍)의 신위를 맨 윗자리에 모시고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

        충청도(忠淸道)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황진(黃進), 경상우도(慶尙右道) 병마절도사(兵馬節道使) 최경회(崔慶會) 등

        장군들의 위패를 모셔놓고 있다.

 

 

 

           창렬사 오른쪽 사당에도 순국하신분들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전파문 안쪽 오른쪽에는 비석들이 세워져 있다.

 

 

 

         창렬사를 참배하고 전파문을 나서면서 바라본 솟을대문 형식의 유중문, 가을이 오는것을 실감할 수 있다.

 

 

 

 

 

 

          호국사 좌측(북편)에는 창렬사가 있고 오른쪽(남쪽)에는 서장대가 있다.

 

                             서장대 (西將臺)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6호

                                                                                              소재지 : 경상남도 진주시 남성동

 

          진주성 서문에 속하는 장군의 지휘소이다. 여지도서 (與地圖書)에는 회룡루(回龍樓)로 기록되어,

          규모는 작으나 남장대인 촉석루와 같은 다락집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지금의 서장대는 허물어진 것을 1934년 서상필(徐相弼)씨가 출자하여 새로 지은것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옆에서 보면 팔(八)자 모양의 팔작지붕을 올린 목조 기와집이다.

          현재 걸려 있는 현판의 글씨는 정명수(鄭命壽)씨가 썼다.

 

 

 

       서장대에서 바라본 진주남강 그리고 음악분수대와 천수교. 지금이 유등축제기간이라 남강에 유등이 많이 뛰워져 있다.

 

 

 

         서장대 옆의 성벽을 따라 걷다보면 나무들 사이로 호국사의 풍경을 볼 수 있다.

 

 

 

             호국사를 지나서 성벽을 따라 조금 더 걸어가다보면 성벽 앞에 조선시대 대형총통이 전시되어 있다.

 

 

 

         총통의 구조도...

 

 

 

         호국사 뒷편과 박물관 뒷편의 사이길을 걸어서 북쪽 성벽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다보면 진주성포루가 나온다.

       여기도 총통이 전시되어 있다.

 

                            진주성포루

       진주성을 방어하는 포진지다. 선조40년 (1607) 병사 김태허 (1555~1620)에 의해 진주성 내, 외성에 포루 12좌가 설치

       되었는데 「여지도서」 의 「경상우도병마절도영」 조에 의하면 "내성의포루는 3곳이니 삼가, 의령, 곤양 등 3읍의 소속"

       이고  "외성의 포루는 9곳이니 진주. 단성. 초계. 거창. 사천. 함양. 남해. 합천 등 8읍 소속"이라고 하였다. 1969년부터

       진주성을 복원 하면서 상징적으로 1개소만 복원하였다.

 

 

 

       진주성포루의 오른편(진주성 서편 중앙)에는 국립진주 박물관이 자리를 잡고있다.

 

 

 

        국립 진주 박물관 전경이다. 박물관에 대해서는 차후에 포스트를 별도로올리기로하고 북장대 방향으로 발걸음을 돌린다.

 

 

 

           진주성포루에서 북편성벽을 따라 계속 걷다보면 청계서원이 나온다.

 

 

 

                            

                                      청계서원 (淸溪書院)

                                                                                                                    진주시 남강로 626 (남성동)

         이 곳은 고려병부상서로 거란의 침입을 물리친 진양부원군 은열공 관정 정 신열 선생과 고려 공민왕 13년

          (1364년, 갑진년) 봄 이 땅에 목면 씨앗을 처음심어 그 중 오직 한 알을 살려 크게 번연시키고 씨아와 물레

         그리고 베틀을 창제하여 [고려사, 태조실록에 기록] 온 백성들에게 따뜻한 목면 베옷을 입힌, 고려 공민왕

         때 전객령 판부사로 치사(致仕)하신 진양군 문충공 퇴헌 정천익 선생을 모신 곳이다.

         조선 순조 33년에 영호남 유림들이 선생에 대한 보은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진주의 서쪽 대평면 마동 남강

         변에 청계서원을 세웠더니 예조에서 해마다 춘추로 관원을 보내 생폐와 향촉을 봉진사림 봉사해 오던 중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된 후 1961년 후손들이 이 곳에 복원사업을 시작하여 경덕사와

         정교당을 건립하고, 봉남서당이란 이름으로 그 맥을 이어오다가 1986년부터 1993년까지 정부의 도움과

         후손들의 정성으로 승은사와 전사청을 재건하고, 청계서원으로 복원하여 매년 음력 3월 15일 두 사당에

         제향을 올리고 있다.

 

 

 

       청계서원 안쪽 본채건물이다. 10월 7일 이곳을 찾았을때 이건물 오른쪽에 있는 숭은사(崇恩祠)에서 제(祭)를 올리고 있었다.

      스크롤 압박상 나머지 건물은 생략 해야겠다.

 

 

 

        청계서원을 지나서  역시 북편성벽을 따라 걷다보면 북장대가 나오고 북장대 앞에는 경절사가 위치하고 있는데,

      북장대는 조금 있다 소개 하기로 하고 우선 경절사에 대해 잠시 알아보고 내려가보자.

 

 

 

           경절사 대문은 큰 자물통으로 채워져 있어서 들어갈 수는 없었다.

 

 

 

                        

                                      경 절 사  [擎 節 祠]

                                                                                                                         소재지 : 경상남도 진주시 남성동

             이 곳은 고려조(高麗朝) 충절신(忠節臣) 하공진(河拱辰) 장군(將軍)의 영정(影幀)과 위패(位牌)를 봉안(奉安)하고

             향례(享禮)를 받드는 곳이다. 공(公)은 현종원년(顯宗元年, 1010), 안으로는 왕실(王室)의 위난(危難)을 수호(守護)

             한 공(功)을 세웠고, 밖으로는 거란(契丹 : 계단)의 40만 대군(大軍)을 삼촌설(三寸舌)로 퇴각(退却)케 하였을뿐

             아니라 국가(國家)를 위하여 적국(敵國)의 볼모가 되어 절개(節槪)를 굽히지 않고 의(義)를 좇아 신명(身命)을 홍모

             (鴻毛)와 같이 버리신 분이다.

             그러므로 나라에서는 문화시랑동평장사(門下侍郞同平章事)를 추증(追贈)하고 영정(影幀)을 기린각(麒麟閣)에

             모시었다. 공(公)의 죽음은 곧 위국충절(爲國忠節)의 상징(象徵)이 되어 이곳 진주(晉州)를 충절(忠節)의 고장이라

             일컫는 효시(嚆矢)가 되었다.

            

 

 

          경절사 우측(동편)에는 비석들이 줄지어 서서 비석군을 형성 하고 있다.

 

                                         진주성비석군

        조선조 선조37년(1604) 합포(마산)에 있던 경상도 우병영을 진주성으로 옮긴 병사 겸 목사

        이수일의 유애비를 비롯, 효종10년(1656) 목사 성이성의 청덕 유애비 등 조선시대에 세워진

        30여기의 비석군이다. 이 비석들은 진주성 또는 시내 각처에 있던 것을 1973년 문화재보호

        협회 진주지부에서 모은 것이다.

 

        비석군을 우측으로 돌아서 다시 성벽을 따라 서쪽으로 가다보면 북장대가 나오는데...

 

 

 

        북장대가 바라다 보이는 곳에 바위들이 운집 해 있는것을 볼 수가 있다. 여기에 전해내려오는 전설이 하나 있다.

       그 전설의 내용을 잠시 이야기 하자면.....

 

                   용다리 전설 [The Dragon Bridge Legend]

       지금의 동성동 212-1번지(삼성화재) 부근에는 예전에 용머리가 양쪽으로 붙어 있는 돌다리가 하나 있었는데, 이 용다리

       에는 슬픈 사랑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때는 고려 초 진주의 한 마을 군수 이씨에게 딸이 셋 있었다. 그 중 둘째 딸은 불

       행히도 출가하자 마자 남편이 죽어 친정으로 돌아와 지내고 있었다.

       군수의 집 머슴 돌쇠는 이때부터 아씨를 사모하게 되었고 아씨 역시 돌쇠의 성실하고 충직한 모습에 마음이 끌리게 되었다.

       그러나 신분상의 차이로 인해 서로는 벙어리 냉가슴 앓듯 했어며, 둘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가 없었다.

       그러다 아씨는 상사병으로 그만 목숨을 잃게 되었고, 돌쇠는 아씨를 장사지내러 가는 도중 용다리 위에서 무심결에 도랑물

       을 보게 되었다. 그런데 그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마치 죽은 아씨처름 보여 “아씨” 하고 소리치다 그만 미쳐버리고 말았

       다. 이후, 이군수는 딸을 잃은 이곳을 떠나려고 막 용다리를 건너가고 있는데 뒤따라 오던 돌쇠가 보이지 않아 주변을 찾아

       보니 이미 돌쇠는 다리 옆 고목에서 목을 맨 상태였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조용하던 용다리 밑 개천에서 수천마리나 될 듯

       한 개구리 울음소리가 들려 왔는데 이는 마치 죽은 돌쇠가 우는 소리와 같았다.

       그뒤부터 용다리 밑에는 진주에서 개구리가 가장 많이 모여 울게 되었다. 짝을 지은 남녀나 부부가 지나가면 울음이 끊겼으

       며, 상사병에 걸린 사람이 용다리를 두번 왔다 갔다하면 씻은 듯이 병이 나았다고 한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돌쇠가 이루지

       못한 사랑을 남에게 라도 이루게 하려는 돌쇠의 지성이라고들 말하고 있다.

       6.25전까지 돌쇠가 목매어 죽은 고목에 아들을 원하던 사람들은 한식에 한번씩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지금은 용다리의 흔적만이 진주성 안에 남아있다.

 

 

 

 

                                          북 장 대 (北 將 臺)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4호

                                                                                           경상남도 진주시 남성동 167

             북장대(北將臺)는 조선중기(朝鮮中期)에 건축된 정면 3칸(間) 측면 2칸(間)의 팔작(八作)지붕

          다락집형 건물(建物)로서 내성(內城)과 외성(外城)에 포진한 성(城)의 병력(兵力)을 지휘(指揮)

          하던 곳이다. 일명 진남루(鎭南樓)라 부르며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 불타 없어진 것을 1618

          년 병사(兵使) 남이흥(南以興)(1576년~1627년)이 중건(重建)하였고 현재의 건물은 1964년에

          중수(重修)한 것이다.

 

 

 

            북장대 앞 길가의 은행나무는 노오란 은행이 주렁주렁 달려서 나름대로의 가을색을 표현 해주고 있다.

 

 

 

         북장대를 보고 걸어왔던 방향으로 발길을 다시 돌려서 비석군 앞으로 내려와서 동쪽을 보면 그곳에 영남포정사가 있다.

         지금 보고 있는 위치는 영남포정사 뒷부분이다.

 

 

 

 

                                    영남포정사 (嶺南布政司)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3호

                                                                                          소재지 : 경상남도 진주시 남성동 73의 11

 

         영남포정사(嶺南布政司)는 조선조말 경상남도관찰사(慶尙南道觀察使)의 선화당 관문(宣化堂 關門)으로서

         일명 망미루(望美樓)라고도 불렀다. 처음 창건은 조선조 광해군 10년(光海君. 1618) 병사(兵使) 남이흥(南

         以興, 1576년~1627년)이 경상우도병마절도사 집무청(慶尙右道兵馬節度使)인 관덕당 내동문(觀德堂 內東

         門)으로 건립한 이래 경상도우병영(慶尙道右兵營)의 관문(關門)으로도 활용 되었다.

         고종 32년(高宗, 1895)에 8도제(道制)를 폐지(廢止)하고 전국(全國)을 23부제(府制)로 시행함에 따라 이곳

         에는 진주부(晋州府)가 설영(設營)되어 진주관찰부(慶尙南道府)의 선화당(宣化堂) 관문이 되었다.

         다음해인 건양원년(建陽元年. 1896)에 다시 전국을 13도로 개편(改編)함에 따라 경상남도가 설영(設營)

         되어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의 선화당 관문이 된 이래 1925년 도청(道廳)이 부산부(釜山府)로 옮겨

         갈때까지 그 문루(門樓)로서 영남포정사(嶺南布政司)라 이름 하였다.

         이 건물을 본따 영남포정사(嶺南布政司)가 창원시 용지공원(昌原市 龍池公園)에 세워져 있다.

        

 

 

 

              영남 포정사 입구 오른쪽에는 하마비(下馬碑)가 세워져 있는데 하마비를 세운 이유는 아래와 같다.

        

                                   하마비 (下馬碑)

            수령이하(守令以下皆下馬) 모두 말에서 내려 들어 가라는 표석(標石)이다. 조선조 선조37년(1604) 

            이래로는 경상도우병영(慶尙道右兵營), 고종32년(1895)에는 진주관찰부(晋州觀察府), 건양원년(建

            陽元年)(1896)이래로는 경상남도관찰부(慶尙南道觀察府)가 있던 곳으로 우병영(右兵營)의 정문인

            망미루(望美樓), 관찰부의 정문인 영남포정사(嶺南布政司) 입구에 세워진 것이다.

            병사(兵使) 및 관찰사(觀察使) 이외의 모든 사람은 모두 말에서 내려 가라는 뜻이다.

 

 

 

 

       영남포정사를 지나서 경사길을 내려 오면서 잠시 뒤돌아보니 입구에는 장군이 지키고 서있고 영남포정사로 올라가는

       길 양쪽에는 유등포졸들이 줄지어 서있다. 밤에 불이 들어오면 보기가 더 좋을것 같다... 는 생각이 든다.

 

 

 

 

        영남포정사를 내려와서 북쪽 공북문으로 가다보면 김시민 장군 동상이 서있다.

        김시민 장군 동상 앞 석판에는 아래와 같은 글이 새겨져 있다.

 

                          忠武公  金時敏  將軍

 

        청사에 빛나는 진주대첩을 쓰고 간 충무공 김시민 장군은 1554년 충남 천안 병천에서 지평(持平) 충갑(忠甲)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안동,  1578년 무과에 급제, 훈련원 * 군기시(軍器時)판관(判官)을 거쳐 1591년 진주

        판관이 되었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목사(牧使)가 병으로 죽자 그 직을 대신하여 민심을 다독

        이고 성과 못을 수축하는 한편 무기를 정비하고 군사체제를 갖추어 사천 * 고성 * 진해 * 지례 * 금산(金山) 등

        지에서 승전고(勝戰鼓)를 울리며 목사로 승진되었다. 그리하여 같은 해 10월 5일 침공한 적의 2만 대군을 불과

        3,800여 병력으로 6일간의 공방전 끝에 크게 무찔러 이기니 곧 진주대첩이다.

        그러나 이마에 적탄을 맞았다. 이어 경상우도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으나 병상에서 나랏일을 근심하며 눈물짓

        다가 39세를 일기로 이 곳 진주성에서 순절(殉節)하였다. 슬프다! 장군의 천수(天壽)가 꺾이지 않았던들 이듬

        해 (癸巳) 6월 진주가 적의 손에 떨어졌을까. 1604년 선무공신(宣武功臣)에 추록된 뒤 영의정에 추증되고 상락

        부원군(上洛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시호는 충무(忠武). 이에 만 사람의 뜻을 모아 장군상을 세움은 나라와 계레

        를 있게 한 그 매운 충절을 만세에  전해 우러르고자 함이다.

                                                                                                             2000 년  1 월  1 일

 

 

 

 

             진주성 안쪽에서 바라본 공북문이다. 그런데 저기 고전의상을 입은 세사람이 보인다.

 

 

 

           앞의 두사람은 총각이고 뒤에 노란옷을 입은 사람은 아가씨 인데 북을 둥!~ 둥!~ 두드리면서 진주성을 돌아다닌다.

         그러다가 진주성을 찾는 손님들을 위해서 모델이 되어 주기도 하고 손님들과 같이서서 사진도 찍기도 한다.

         공북문에 대한 소개는 다음 포스트에서 하기로 하고 여기는 금연구역이니까 담배를 못피우니 일단 나갔다가 담배

         한개피 태우고 다시 들어와야겠다.